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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화는 책을 내려놨다. 너무 많이 읽어서 일 년 새 책 끄트머리가 희미하게 닳아버렸다. 별것 아닌 시 하나. 그러나 별것이었다. 연화는 물끄러미 시집의 표지를 바라보다가 곧 시선을 돌렸다. 앞에는 캔버스가 놓여있었다. 남자의 등을 그린 스케치가 있었다. 연화는 연필을 쥔 채 그걸 가만히 보기만 했다. 손을 들어 스케치를 더 할 법도 한데 그저 가만히 그것을 보고만 있었다. 쉬이 손댈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보다 아름다울까? 이미 아름다운데.

 해강, 아니 휼이 모델을 서줬다. 그를 어떻게든 잡아보려고 건넸던 말이 현실이 되었다. 그의 후원을 하기로 했고, 계약서를 썼다. 그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접점이라고는 그 악몽에서 만난 게 전부인데 빚을 갚아주고 자리를 잡을 적까지 후원해준다니. 갚으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연화는 그 돈을 돌려받을 생각도 않았다. 그저 그렇게 하면 더 오래 붙잡아 둘 수 있을까봐, 곁에 두고 볼 수 있을까봐 핑계를 댄 것뿐이지. 개인재산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보거나 새삼스레 떠올린 적은 없었으나 이번만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휼에게는 그저 돈 있는 아가씨의 사치스러운 변덕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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